어렸을 때 읽었던 유럽 동화 가운데,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 왕이 딸의 남편을 고르기 위해 조건을 내건다. 조건은 간단하면서도 기괴하다. 1년 동안 씻지도 않고, 코도 풀지 않으며, 그 상태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버틸 것. 그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에게 공주를 주겠다는 내용이다. 결국 한 남자가 이 시험을 통과해 공주의 남편이 된다.

어린 시절에는 이 이야기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왕이 기대한 것은 극단적인 인내심일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일까, 혹은 권력을 지킬 수 있는 강한 남자였을까. 그래서 이 이야기를 단순히 ‘의지를 시험하는 동화’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 보니, 왕이 원했던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이 시험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보존’**이었을 가능성이다.

그 남자는 1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꾸미지도 않았고, 개선하지도 않았으며, 손대지도 않았다. 즉, 받은 것을 쓰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는 능력을 증명한 셈이다.
왕의 입장에서 가장 위험한 사위는 무능한 사람이 아니라, 능력 있다는 명분으로 왕국의 재산과 질서를 자기 방식대로 바꾸려 드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공주는 아직 어리고, 지혜와 판단력은 완성되지 않았다. 왕에게 필요한 인물은 공주가 준비될 때까지 자원을 소모하지 않고 그대로 지켜 줄, 말하자면 ‘창고지기’ 같은 존재였다.

이 동화는 영웅담이 아니었다. 앞서 나가고, 개혁하고,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사람의 이야기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망치지 않고 유지하는 사람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였다.
중세 사회에서 권력과 자원을 쥐고 지켜온 최고 지도자가 원했던 인재는, 미련해 보일 정도로 현상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 선조들 역시 지켜내는 집착에 대한 비슷한 표현을 남겼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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